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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천재수술(최종회)

혜성은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공부에만 집중하며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최상의 성적을 유지하였다. 혜성의 아버지 지성은 유림이 만든 알약을 분석하여 먹으면 천재가 되는 알약을 몇 번의 실패 끝에 제조에 성공하였다. 이 소식은 곧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일순간에 이지성 교수에게 부와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지성은 알약제조와 관련된 기술제휴는 송이의 할아버지가 회장으로 있는 k 재단의 제약계열회사와 맺었다. 이로 인해 이지성 교수의 연구실에는 기자들의 출입이 끊이질 않았다. 그중에서도 눈여겨볼 사람은 네이쳐 한국지사에 근무 중인 김유리 기자였다. 시간이 갈수록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김유리 기자의 출입이 잦아졌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서 어느새 유림이 말했던 그 날이 내일로 불쑥 다가왔다.

 

아버지, 오늘 수능 대비 마지막 모의고사가 있는 날이에요. 오늘 마치면 5시쯤 될 건데 저녁에 바쁘세요?”

 

가방을 챙겨서 나가던 혜성이 지성에게 말했다. 지성은 거울을 보며 혜성에게 말했다.

 

아니, 특별히 바쁜 일은 없다. 오늘 그럼 한번 볼까? 그런데 혜성아, 유리도 같이 나가면 될까?”

 

혜성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 아버지. 그러세요. 그럼 저는 송이랑 나가도 상관없으시죠?”

 

오케이. 그럼 아버지 병원 근처 자주 보는 커피숍에서 6시에 보도록 하자.”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의 약속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사실 유림이 1년 전에 얘기한 내용을 두 사람은 잠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성에게는 1년 사이 너무나 많은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고, 혜성은 수능시험준비로 아무런 생각이 없었기에 그들의 망각이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편 이곳은 유림이 사는 미래의 어느 시간대. 거울 앞에 서 있던 유림은 뭔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알았다. 유림은 거울 속에서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비쳐 보이는 걸 느꼈다. 유림은 처음에 잘못 보았나 싶어서 다시 거울을 유심히 살폈다. 분명히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었다.

 

피곤해서 그러나?”

 

하지만 몇 번을 봐도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거울에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훨씬 성숙한 40대 중년의 모습으로 거울에 반사되어 나타나 보이는 것이 아닌가? 유림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10대에서 70대를 넘나들며 소녀에서 아줌마, 노파의 모습까지 다양하게 모습을 변신하며 거울 속에서 변화하고 있었다. 유림은 거울에서 눈을 떼고 자신의 모습을 직접 만져 보았다. 입고 있는 옷은 그대로인데 자신의 몸이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울 속 허상이 변하는 게 아닌 자신이 직접 변하고 있었다. 유림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유림은 노파의 모습으로 변해있는 자신을 거울로 쳐다보면서 비명을 질렀다.

 

이건 꿈이야, 현실이 아니야.”

 

유림은 한 손으로 선반 위에 놓여 있던 가방을 집어서 바닥으로 던졌다. 던지는 가운데 가방 줄에 사진첩이 걸려서 바닥으로 같이 떨어졌다. 그때 사진첩 속 사진이 몇 장 방바닥에 떨어져 나왔다. 그곳에는 바이러스가 퍼지기 전 친구들로 보이는 몇 명의 아이들과 같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그런데 사진을 보던 유림은 사진 속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림은 친구들과 찍었던 사진을 하나씩 찾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 속 기억의 흔적이 사라져 버렸는지 기억을 떠올리려 해도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유림은 다른 사진들을 들추어보며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어떤 사진은 기억이 날듯 말듯하며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떤 사진은 기억이 도무지 나지 않았다. 레테의 강물이라도 마셨나? 유림은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사진첩을 뒤적이던 그녀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이상해. 기억이 나지 않는 게 띄엄띄엄 나타나고 있어. 오래된 일이 기억에서 지워지는 건 그렇다 쳐도 이건 중간중간 기억이 끊겨서 나타나고 있어. 나한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지 기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그녀가 미지의 빛에 노출되고 난 후 처음 시간여행을 하고 본래의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검은 정장 차림의 선글라스를 낀 두 명의 미지의 사내가 어린 유림에게 다가왔다.

 

유림 학생, 첫 시간여행을 하고 난 기분이 어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지? 시간여행을 직접 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기분을 모르지. 그런데 오늘은 유림이 처음으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 기념비적 날이라 알려 줄 내용이 있어서 왔다.”

 

당신들은 누구세요?”

 

그냥 시간 경찰 (Time Cop)정도로 생각해. 이 세계에는 의외로 시간여행을 즐기는 자들이 많이 있어.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는 거지.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에 얘기하도록 하고 본론만 얘기하지. 시간여행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네가 과거나 미래로 가서 일어난 일들을 바꾸어 놓으면 그 일이 일어난 시간은 그 순간 정지해 버린다. 정지한 시간이 늘수록 연결된 시간의 고리는 차츰 비틀리기 시작하면서 시간에 균열이 생기고 생겨난 균열은 공간을 왜곡시키며 인과율을 파괴해. 결국에는 시간이 정지한 시점을 중심으로 자신의 시간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된다. 그 징후로 나타나는 게 자신의 과거가 하나씩 죽어가게 되고 결국 현재의 자신도 죽어버리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다. 지금은 이 얘기가 아직은 와 닿지 않겠지만 언젠가 이 말이 떠오를 때가 있을 거다. 그때는 이미 돌리기에 늦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해.”

 

그럼 부득이하게 과거를 바꾸어야 할 상황이면 어떻게 되나요?”

 

다시 말하지만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다. 모든 일은 인과율에 따라 시간이 흐르도록 해야만 한다. 그게 아니면 너는 시간의 루프에 갇히거나 시간의 틈새에 끼여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시간 지옥에게 먹혀서 영원히 지금의 현재로는 돌아올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명심해라. 모든 일은 인과율에 따라 시간이 흐르도록 해야 한다. ”

 

유림은 숨을 크게 한번 쉰 후 바이러스로 인적이 없는 주변의 아파트 옥상 난간 위로 올라갔다. 20층 높이에서 보는 지상은 아찔해 보였다. 유림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쉬고는 몸을 던졌다. 유림의 몸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몸 주위로 푸른색의 빛이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잠시 후 유림은 공중에서 사라졌다.

 

유림은 냉기가 피부에 와 닿으며 고무로 만든 깔때기 모양의 튜브를 통과하는 감촉을 잠시 느꼈지만 곧 입구로 몸이 빠져나오며 밝은 빛이 유림을 눈부시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곳은 현재의 시간. 유림은 혜성의 고등학교 후문에 도착했다. 어제저녁에 새워둔 자동차가 그대로 주차해 있었다. 차 문을 열고 들어간 유림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오후 4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오늘은 혜성이 마지막 수능 대비 모의고사를 치는 날이라 곧 430분이 되면 혜성이 정문으로 걸어 나올 것이다. 유림은 운전석 앞쪽에서 가방을 끄집어내었다. 가방을 열자 한 자루의 사제권총이 들어있었다. 총을 꺼내서 자신의 코트 안쪽에 넣고는 어디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송이였다.

 

유림, 오늘 만나는 거야. 알았어.”

 

유림은 운전석에 몸을 파묻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차로 다가오는 190cm는 됨직한 큰 키의 잘생긴 사내가 있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유림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유림은 못 본 척 애써 외면을 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본인도 모르게 그 남자를 향해 가고 있었다.

 

왜 저리 잘생겼지? ’

 

남자가 유림의 주차한 차량 앞으로 다가와서 차의 창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유림은 차 문을 내리고 낯선 미남자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세요? ”

사내는 웃으면서 말을 하였다.

 

안녕하세요. 어릴 때 한번 보고 두 번째군요. ”

 

누구신지? ”

 

당신이 처음 시간여행을 하고 난 후 블랙 정장을 하고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두 명의 남자를 본 일을 기억하세요?”

 

, 그 타임캅(TimeCop)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던 남자들 말이군요.”

 

. 역시 머리가 좋으시군요. 저는 그때 왼쪽에 같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오늘은 좋지 못한 일로 당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당신은 몇 번의 인과율을 깨는 시간 범죄를 저질렀어요. 굳이 제가 얘기를 안 해도 수긍하시죠.”

 

유림은 말이 없었다. 사내는 유림을 쳐다보며 기다렸다.

 

다 옛날에 저질렀던 일인데 왜 갑자기 지금에서야 나타나 추궁을 하시는 거죠.”

 

당신의 시간 임계점이 한계에 이르렀어요. 임계점을 초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계시죠? 당신에 의해 뒤바뀐 과거와 미래의 시간대는 정지되기에 이르고 그 시간이 늘수록 연결된 시간의 고리는 차츰 비틀려서 시공간을 파괴하고 결국에는 인과율이 파괴되죠. 결국에는 시간이 정지한 시점을 중심으로 자신의 시간은 영원히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그 징후로 나타나는 게 자신의 과거가 하나씩 죽어가게 되고 결국 현재의 자신도 죽어버리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거죠. 근간에 자신이 사는 시간대에서 자신의 시간대가 죽어버리면서 생기는 징후를 못 느끼셨나요? 그렇죠. 느끼고 계실 겁니다. 오늘 당신이 만약 또 다른 인과율을 깨뜨리는 일을 하시면 당신은 영원히 시간의 감옥에 갇히게 됨과 동시에 인류 전체의 인과율이 파괴되는 특이점(S.W.S)이 열리게 됩니다. 그럼 원래 있던 지구를 중심으로 한 여러 평행 지구들이 하나로 모이게 되는 뒤틀린 공간의 특이점(S.W.S; Singularity of Warped Space)이 생기게 되어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죽음의 블랙홀이 나타나게 되어 모든 시공간대의 전 인류가 몰살하는 끔찍한 범 우주적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림은 자동차의 시동을 걸고는 빠르게 가속페달을 밟아 앞으로 발진해서 나갔다. 미처 사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유림은 치고 나갔다. 유림이 차를 몰고 앞으로 나가자 정문 쪽에 혜성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유림은 차를 급하게 멈추며 혜성에게 말했다.

 

혜성, 빨리 타요. 지금은 말할 시간이 없어요. 빨리...”

 

혜성은 얼떨결에 유림의 옆좌석에 타게 되었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은 시간이 없어요. 우선 이곳을 빠져나가고 나서 얘기해요. 꽉 잡아요.”

 

차는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뒤에서 한대의 검은색 페라리가 유림의 BMW 세단 승용차를 바짝 따라붙고 있었다.

 

운전할 줄 알아요? ”

 

. 그럼 자리 바꿔 앉아요. 운전대 잡아요.”

 

유림은 유연하게 몸을 혜성의 앞으로 가져갔다. 엉덩이와 등이 혜성의 사타구니와 접촉되자 혜성이 얼굴이 빨개졌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이 멍청아.”

 

유림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몸을 운전석 옆으로 틀어 앉았다. 겨우 몸이 빠지자 창문을 열고 뒤를 돌아 총을 쏘기 시작했다.

 

탕 탕 탕... 공기 찢어지는 파열음과 함께 총소리가 귓가에 얼얼하게 들려왔다. 혜성은 차의 가속페달을 최대로 밟았다. 어느새 경찰차가 따라붙었다.

 

수영 잘하죠?”

 

, 그건 왜?”

 

곧 한강 고수 부지 쪽에요. 방화대교 쪽으로 차를 몰아서 그대로 강으로 돌진해요. 이건 간이 호흡기에요. 30분은 물속에서 숨 안 쉬고 버틸 수 있어요. 제가 연락드릴게요.”

 

잠시 후 차가 방화대교로 진입해서 들어가자 유림은 갑자기 차의 핸들을 재빨리 꺾어 버리자 차는 안전레일을 치고 공중을 날았다. 그 순간 푸른빛이 유림의 몸을 감싸면서 공중에서 그녀는 사라졌다. 바다로 뛰어든 자동차는 한강 바닥으로 곧장 빠져들었다. 차에서 박차고 나온 혜성은 유림이 준 간이 호흡기를 구부려 양쪽 콧구멍에 끼우자 끝부분이 버섯 돌기처럼 부풀며 콧구멍을 막았다. 유림의 말대로 호흡기를 통해 산소가 발생하였다. 혜성은 한강 저편으로 빠르게 헤엄쳐 갔다.

 

한편 혜성과 약속을 잡았던 지성은 Y대 부근의 인근 15층 라운지 커피숍에서 유리와 먼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십여 분 후 김송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혜성이와 같이 오는 줄 알았는데..”

 

, 혜성은 집에 들렀다가 온다고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이 왔어요.”

 

송이는 유리를 힐끗 보면서 자리에 앉았다. 유리는 송이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빨개졌다.

 

송이는 그걸 또 유심히 쳐다보고 그래요?”

 

, ... 하하하. 그렇죠. 몇 개월인가요?”

 

이제 3개월 됐어요.”

 

지성이 자연스럽게 유리의 배에 손을 가져가며 말했다.

 

천재 알약을 만든 날 술을 먹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뭐 어때요? 독일의 괴테는 80이 넘은 나이에도 십 대 소녀를 사랑했다고 하는데.”

 

송이가 웃으면서 말을 하자 지성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혜성이 어두운 표정으로 실내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혜성의 굳은 표정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혜성아, 학교에서 안 좋은 일 있었니? 시험 못 쳤어?”

 

지성이 물어보자 혜성은 대답이 없었다.

 

아버지, 방화대교에서 한강 아래로 추락한 BMW 자동차 이야기는 들으셨어요?”

 

아니, 근데... 혹시 너 ? ”

 

혜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위를 한번 둘러본 후 자기가 겪었던 일을 조심스럽게 틀어놓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성이 심각한 얼굴로 혜성을 쳐다보며 물었다.

 

지금 유림과는 연락이 안 되고?”

 

혜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이가 말했다.

 

제 생각에는 유림이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한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요.”

 

잊었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 지성은 표정이 굳어지고 있었다. 이야기의 내막을 모르는 유리는 지성의 표정이 안 좋은 걸 보고는 지성에게 무언의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지성은 유리에게 그간 있었던 얘기를 해주기 시작하였다. 유리의 표정이 시나브로 변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유리는 실소를 금치 못하였다.

 

지금 저에게 그 얘기를 믿으라는 건가요? 시간 여행자가 가공할 바이러스의 공격으로부터 미래의 인류를 구하기 위해 과거로 온다. 인류를 구할 열쇠는 제 뱃속 아이의 혈청. 근데 이상하지 않나요?”

 

뭐가?”

 

지성이 물었다.

 

혜성이 공격할 사람은 당신이라고 얘기했는데. 지금은 당신의 죽음과 관계없이 아이는 살아있잖아요. 그럼 왜 굳이 교수님을 공격한다고 그랬을까요? 특히 혜성은 살해 동기가 명확하지 않는데. 안 그래요. 혜성?”

 

당신은 아버지가 만든 알약을 하나 먹어야겠군요. ”

 

혜성이 퉁명스럽게 말을 뱉자 유리가 약이 오른 듯 말했다.

 

요즘은 물 많이 안 드세요?”

 

혜성은 못 들은 척 지성과 송이를 보고 입을 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림을 처음 만난 날 그녀가 했던 말 중에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있을 수도 있어요?”

 

그게 뭐야?”

 

송이가 물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와 했던 대화 중에 이런 얘기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유림에게 그럼 유리아 어린 시절로 돌아가서 혈액을 채취하면 안 됩니까?”라고 묻자 유림이 이렇게 말 한 걸로 기억해. “교수님도 알약을 하나 드셔야겠군요. 그 아이는 제가 이곳에 나타났기 때문에 수정이 가능하게 된 거에요. 이해가 되시죠?”라고... 지금 유리아란 아이는 유리배속에서 자라고 있어. 그런데 김유리 기자가 아버지를 만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버지가 천재 수술을 대체할 수 있는 알약을 만들었기 때문이야. 은밀하게 말하면 그 알약은 지금 만들어져서는 안 될 약이야. 한마디로 인과율에 위배 되는 일이야. 미래의 유림이 그 알약을 만들었다고 본인의 입으로 직접 얘기를 했었어.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 수 있어. 유림이 나타남으로 인해 미래가 변할 수 있다는 거야. 아니 변했어.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 김유리 기자의 뱃속 아기도 없어야 해. 그럼 그녀가 의도하고자 하는 게 뭘까? γ 바이러스 얘기는 아직 우리에겐 오지 않은 미래지만 그녀에게는 현실이야. 즉 그녀의 의중은 미래를 조작하는 게 아닌가 싶어.“

 

어떤 미래를 조작한다는 말이냐?“

 

지성이 물었다.

 

그건 저도 몰라요. 저에겐 아직 미래의 일이니까요. 더불어 한 가지 확실한 건 저는 감옥에서 쓸쓸히 죽어가지는 않을 거란 사실입니다. 저는 누구도 죽이지 않을 거예요. 즉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은 거란 얘기죠.“

 

듣고 있던 송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 배속 아기는?”

 

혜성은 화들짝 놀라며 송이를 쳐다보았다.

 

너 그날? 필름이 끊긴 날 그럼...”

 

그래, 수능 100일째 되던 날 못하는 술 한잔하고 내 방에 업혀서 왔던 날...”

 

이 바보야, 아무 일 없었다고 나한테 그랬잖아.”

 

너 공부에 방해될까 그랬지. 안 그래도 수능 끝나고 나면 얘기하려던 참이었어.”

 

얼마나 되었어?”

 

혜성이 다급히 물었다.

 

“2개월째야.”

 

그래서 자고로 남자는 세 끝을 조심하라고 한 거야. ”

 

유리가 비꼬듯 말하자 혜성은 얼굴이 붉어진 채 쥐구멍이라도 찾을 마냥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이 이렇게 되면 유림의 완승인가?”

 

지성이 말하자 혜성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오늘 학교에 나타난 걸 봤을 때 아직은 아니에요.”

 

그때 한쪽 귀퉁이에서 박수 소리가 나며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멋진 추리에요. 이제 제가 이곳에 나타날 이유는 없어요. 혈청은 이미 구했어요.”

 

유림이 황백색의 투명한 액체가 든 밀봉된 작은 병을 들어 보였다. 모두 병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 유리가 유림에게 물었다.

 

이제 더 이상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겠군요? ”

 

그건 모르는 일이죠. 하나의 미래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기를 모두가 원하죠. 그게 인과율의 법칙이니까.”

 

유림, 학교에서 뒤를 쫓던 남자들은 누구야? 그리고 내가 그곳에 타야 했던 이유는?”

 

혜성이 눈을 번뜩이며 유림에게 물었다.

 

그들은 타임캅들이야. 시간 여행자 중 과거나 미래를 조작하여 인과율을 깨뜨리거나 시공간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을 잡아들여 법의 심판을 받게 하는 자들이야. 내가 쫓기는 것은 증발위기에 놓인 인류를 구해서 시공간을 막대한 위험에 빠뜨린다는 거야. 혜성은 큰 관련은 없어. 다만 지금 상황이 위급한 상황이란 걸 보여주고 싶어서야. 이해되죠? 아버지.”

 

내가 봤을 때 너의 의도는 다른데 있는 게 분명해. 즉 넌 뭔가를 숨기고 있어. 난 너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거야. 물론 아버지도 아무 일은 없을 거야.”

 

혜성, 지성 교수는 인과율에 위배 되는 큰 잘못을 저질렀어, 내가 만들었어야 할 알약을 너무 서둘러 만들었어. 미래의 시간이 그로 인해 너무나 많이 꼬여 버렸어. 곧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건 네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어? ”

 

내가 바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야. 이제 지금 모습의 나를 보기는 힘들 거야. 난 나의 계획대로 일을 처리할 뿐이야. 지금의 인류는 너무 많아. 여긴 행성이 아니고 쓰레기장이야.”

 

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곧 알게 될 거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건 남은 수수께끼는 네가 안 풀었으면 좋겠어.”

유림의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유리가 배를 거머쥐고 비명을 질렀다. 지성과 혜성은 놀라며 유리에게 다가갔다.

 

유리야, 왜 그래. 어디 아파?”

 

지성이 다급하게 물었다.

 

배가.. 배가 아파요. 우리 아기? 아기.......나 죽어...”

 

지성은 유리를 안고 커피숍의 스태프실로 달려갔다. 혜성과 송이는 출입을 막았다. 유림과 두 사람은 밖에서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봐야만 했다. 혜성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유림에게 다가가 뺨을 때렸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림의 볼에 혜성의 손바닥 자국이 났다.

 

너 미쳤어. 유리아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어차피 죽을 아이였어.”

 

그때였다. 커피숍의 정문이 우당탕 열리며 두 명의 사내가 권총을 들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김유림,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유림은 재빨리 의자를 하나 집어 들고 창가를 향해 냅다 달리기 시작하였다. 혜성이 이렇다 할 손을 쓰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 명의 키가 큰 사내들은 유림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탕 탕 탕 ... 세 발의 총성이 커피솝 안에서 울렸고 이에 놀라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곧 실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한발의 총알이 유림의 어깨를 관통해 뚫고 지나갔다. 유림은 들고 있던 의자를 있는 힘을 다해 창가로 던지면서 총알을 발사했다. 대형 창문이 박살이 나면서 깨졌다. 유림은 전력을 다해 달려서 깨진 창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혜성은 유림을 뒤쫓아 달렸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하늘에서 푸른 빛이 유림의 몸을 감싸며 유림은 곧 사라져갔다. 그때 유림은 뭔가 단어를 외치며 사라졌다. 뒤따라온 두 명의 남자들도 공중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유림처럼 푸른빛이 퍼져 나가며 공중에서 사라졌다. 너무나 빠르게 일어난 일이라 혜성도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유림이 무슨 단어를 외치고 사라진 것 같은데 그 단어가 도무지 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클로 시작되는 단어 같았는데...

 

혜성아, 여기 봐.”

 

송이가 혜성을 불렀다. 혜성은 송이가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무슨 일인데...”

 

여기 두 장의 사진이 떨어져 있어. 근데 사진 속에 너와 내가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이 보여. 한 장은 좀 컸을 때의 모습 같은데 아무래도 유림이 사진 같아.”

 

혜성이 송이로부터 사진을 받아서 유심히 보았다. 아기를 안고 큰 저택에서 찍은 사진 한 장과 한 장은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교정에서 여러 명이 같이 어울려 찍은 사진이었다.“

 

혜성아, 여기 보이는 저택은 미국에 있는 할아버지가 살고 계신 곳이야. , 그런데 ...사진이 이상해. 여기 봐.”

 

송이가 말하는 사진을 바라보고 있던 혜성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속의 유림의 모습이 희미해져 가면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기의 모습도 희미하게 사라져가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송이가 물었다. 혜성도 답을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정확한 이유를 본인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혜성은 표정이 굳어진 채 지성이 들어간 스태프실 앞에서 힘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지성이 침통한 표정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지성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

 

유산됐어.”

 

혜성과 송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산모는 어때요?”

 

혜성이 묻자 지성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림이 미쳤어요.”

 

혜성이 한숨을 크게 쉬면서 말을 하자 지성은 말없이 벽에 한 손을 대고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이렇게 세 사람이 침통한 표정으로 있을 때 사라졌던 2명의 사내가 커피숍 안으로 들어왔다.

 

이 혜성씨가 누군가요?”

 

혜성이 손을 들었다. 혜성에게 두 사람이 모였다.

 

저희는 타임캅이라고 합니다. 김유림이 당신의 딸이란 건 알고 계시죠? ”

 

, 그렇습니다만...”

 

지금 유림 박사가 엄청난 일을 도모하고 있어요. 인류를 멸종의 위기에 빠뜨릴 γ 바이러스의 유일한 치료제인 유리아 양의 혈청을 갖고 사라졌습니다. 어느 시간대로 움직였는지 추적이 안 되고 있습니다. 저희 수사망에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제 도움이 필요하단 말인가요? 제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죠?”

 

내일 자정에 당신의 살인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그때 반드시 나타날 것으로 추측됩니다.”

 

혜성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굴 죽인다는 말인가요? 전 지금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당신의 아버지 이지성 박사를 죽이게 됩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저는 어떤 관련성도 없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살해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죽인다는 거죠?”

 

죄송합니다. 저희는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결과를 알고 있을 뿐입니다. 상세한 내용은 대답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인과율에 위배 되는 일의 발생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당신에 의해 이지성 박사가 죽게 됩니다.”

 

유림은 왜 나타나는 겁니까?”

 

지금 현재 유림은 여러 시간대를 오가며 많은 일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시간은 현재 깨어지고 비틀어진 왜곡된 시간이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습니다. 이 시간상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불안정해져서 과거, 현재, 미래가 겹쳐지기도 하고 과거의 기억들을 비선형적으로 잊어버리게 됩니다. 종국에는 시간의 틈새나 무한 루프의 시간 속에 갇히어 죽어갈 겁니다. 그러니 그녀는 얽힌 시간의 매듭을 풀려고 할 것이고 그 출발점이 되는 곳이 자신을 있게 한 부모가 되겠죠. 부모님의 시간을 중심으로 자신이 풀어나갈 시간 들을 하나씩 찾아가면 매듭을 풀 수도 있습니다.”

 

시간의 매듭을 푼다는 것은 어떻게 푼다는 것인가요?”

 

자신이 과거나 미래의 시간대를 변형시켜 놓은 것을 원래대로 바로 돌려놓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의 특이점이 인과율에 따라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게 되고 자신도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과 꼬여진 시간을 정상적으로 돌려놓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런 위험에서 유림을 구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

 

유림을 위한다는 분들이 총을 그렇게 쏘아대도 대는 것입니까?”

 

그건 그녀를 잡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

 

당신들은 유림을 잡는 순간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쏠 것 같아요. 여하튼 제가 지금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돌아들 가주세요.”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저희도 방법이 있습니다.”

 

듣고 있던 지성이 날카로워진 목소리로 그들에게 쏘아 부쳤다.

 

협조를 안 한다고 그러잖아요. 돌아들 가시오.”

 

좋습니다. 내일 후회하지 마시오.”

 

두 사람이 정문을 열고 커피숍 밖으로 나가자 지성은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보고 있던 혜성이 지성에게 달려갔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

 

혜성이 걱정 어린 말로 지성에게 얘기하자 지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송이, 유리, 나 내일까지는 모두 같이 있기로 해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다음날 혜성은 뭔가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처럼 혜성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혜성은 소리가 터져 나오는 곳을 찾기 위해 집안 여기저기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혜성의 움직이는 소리에 지성과 송이가 눈을 떴다. 유리는 어제의 일로 아직 한밤중이었다.

 

혜성, 무슨 일이야?”

 

송이가 졸린 눈빛으로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별일 아니야. 좀 더 자.”

 

잠 다 깼어. 그렇게 시끄럽게 쿵쾅거리는데 안 깰 사람이 누가 있어?”

 

, 벽이나 문 같은 곳을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희미하게 들려와서 소리가 나는 곳을 찾고 있었어.”

 

지금도 들려? 나는 왜 안 들리지?”

 

집중하고 들어봐. ”

 

혜성의 말에 송이는 귀를 쫑긋이 세우고 미지의 소리에 집중하였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송이는 거실을 지나 서재 쪽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서재의 문이 열리자 수천 권의 서적이 가지런히 책장선반에 꽂혀있었다. 송이가 서재 앞에서 걸음을 멈추자 뒤따르던 혜성도 멈추어 섰다.

 

여기서 나는 것 같은데. ”

 

송이가 말하자 혜성이 천천히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발을 디디며 주위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서재의 한편에 꽂혀있던 책이 한 권 비어 있었다. 혜성은 서재 주변을 둘러보며 없어진 책을 찾고 있었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혜성이 책을 주워들자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책을 펼치자 편지지가 한 장 접혀 있었다. 편지지를 펼치자 짤막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1년 전 내가 보낸 쪽지 기억나? 빨리 움직여. 혜림>

 

글을 보던 혜성은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방문을 열고 옷장 속에서 뭔가를 찾고 있었다. 잠시 후 포장지에 쌓인 물건 하나가 나타났다. 클라인 병이었다. 그는 문구를 통해 1년 전 유림이 인터넷으로 보내온 쪽지를 기억해낸 것이다. 서재로 급히 돌아온 혜성은 서재를 투명한 클라인 병으로 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재 쪽 모퉁이 부분에서 유림이 비누 막처럼 생긴 얇고 투명한 큰 구체 속에서 서재의 책을 마구 흔들면서 뭔가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혜성은 유림이 타임캅 들이 얘기한 시간의 틈새나 어떤 비틀린 시공간에 갇혀있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누구를 불러 달라는 말을 하는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있지만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고 병이 아니면 그녀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었다. 근데 유림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송이가 뭔가를 알아차린 듯 외쳤다.

 

그 타임 캅을 불러 달라는 얘기 같은데.”

 

어떻게 불러?”

 

혜성이 큰소리로 묻자 유림은 갑자기 자신의 바지 속에서 사제권총을 하나 끄집어내고는 양손으로 물러서라는 신호를 보냈다. 유림은 중앙정면을 마주 보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총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연속으로 당겼다. 총알이 발사되면서 보이지 않는 시간의 막에 의해 총알이 튕겨 나가며 공중에 멈추어 섰다. 총을 맞은 공간은 총알의 압력으로 고무 마냥 움푹 패였다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갔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자 서재의 벽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천장에 매달아 놓은 형광등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벽에 걸려있던 거울이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그 순간은 서재 주변의 공간이 마치 휘어진 듯 서재에 놓여 있던 물건들이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진동이 일어난 지 1분쯤 되었을까? 타임 캅이 거실을 통해 서재로 달려왔다. 그들은 곧 상의 안주머니에서 큐브를 꺼내 놓고 모서리를 누르고 서재의 한구석에 큐브를 놓았다. 큐브는 빠르게 회전을 하며 녹색 빛을 뿜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떨리던 진동이 차츰 조용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진동이 가라앉자 타임 캅 중 한 명이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갔다. 혜성과 지성, 송이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넋을 잃고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잠시 후 나갔던 타임 캅이 어린 여학생 한 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여학생은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여자였다. 혜성은 순간 사진에서 봤던 유림의 어린 시절을 기억해냈다.

 

넌 어릴 적 유림이 아니냐? ”

 

어린 유림은 표정이 굳은 채 경관에게 물었다.

 

여기는 왜 데리고 온 거예요?”

 

미래의 네가 원하고 있어. 지금 유림은 시간의 틈 속에 잡혀 있다. 유림을 저곳에서 끄집어 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하지만 이 방법은 매우 위험해서 둘 중 하나는 죽을 수도 있어. 하지만 이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서둘러라.”

 

작은 유림이 큰 유림이 있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잠시만요. 확실히는 모르지만 두 명의 자신이 동시에 같은 시간대에 만나면 소멸되어 에너지로 변한다고 들었는데 괜찮을까요?”

 

유림은 너무 많이 과거나 미래로 가서 시간을 바꿔놓았어요. 지금 유림의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혼재된 특이점으로 넘어가기 직전입니다. 그 순간 몇 분간은 블랙홀 속 사건의 지평선 마냥 괜찮을 겁니다.”

 

어린 유림과 큰 유림이 서로의 손을 접촉시켰다. 그러자 두 손의 경계에서 약간의 미동이 생기더니 그 진동은 점점 커져 갔다. 그리고 어린 유림의 몸속으로 큰 유림이 빨려들 듯 안으로 파고들었다. 어린 유림은 고통으로 괴성을 질렀다. 두 몸체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엄청난 빛이 퍼져나갔다. 지켜보던 이들은 너무나 눈이 부셔 눈을 감아버렸다. 밝은 빛이 한참을 비추고 난 후 빛이 사그라들자 그곳에는 어른 유림이 서 있었다. 유림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유림, 당신을 체포합니다. 혈청이 든 병을 주시오.”

 

유림은 순순히 자신의 윗주머니 안에서 혈청이 든 작은 병을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 이렇게 되면 수십억의 인류는 구하게 된 거네요. 그런데 어떡하죠? 혜성이, 아니 아버지 인류는 너무 수가 많아요. γ 바이러스로 인해 인류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어요. 100억이 넘는 지구. 이 질병으로 인류는 극소수만 살아남고 준비된 자들에 의해서 지구는 새롭게 변해가야 해요. 혜성, 누구의 손을 들어주실 건가요?”

 

난 누구의 손도 들어주고 싶지 않아. 넌 죄를 지었으니 처벌을 받아야 해. ”

 

벌을 받더라도 지금은 아녀요. 제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어요. 1개의 시간을 잠시 빌렸을 뿐이에요. 곧 시간의 특이점에 도달하면 전 영원한 시간의 틈에 갇히어 죽을 겁니다. 원래의 시간으로 모든 걸 돌려놓아야 해요.”

 

쨍그랑. 유리병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경관이 유림에게 언성을 높였다.

 

이건 가짜잖아. 진짜는 어디에 있어?”

 

제가 쉽게 진짜를 넘겨주겠어요? 진짜는 제 피안에 있어요. 당신들이 이 혈청을 제 피에서 뽑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요. 제 몸에 γ 바이러스를 주입 후 항체가 만들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영악하군.”

 

유림이 두 명의 경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혜성은 시계를 한번 쳐다보고는 유림에게 물었다.

 

잠시 후면 네가 얘기한 6시야. 내가 미치지 않는 이상 아버지를 살해하지 않아. 왜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거지?”

 

거짓말? 제 얘기를 듣고 나서도 그 맘이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무슨 얘기 말하는 거지?”

 

당신 어머니 김혜정은 어떻게 돌아가셨죠?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아버지 이지성 교수란 건 잊지 않았죠? 그런데 아버지 이지성 교수는 당신이 생각하는 만큼 의롭고 바른 분이 아니에요. 이지성 교수와 정을 통한 여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아요. 교수님이 워낙 출중한 미남인 것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교수님의 여성 편력이 문제에요. 직접 교수님께 물어보시죠?”

 

혜성의 얼굴이 지성을 향했다. 지성은 군기침을 하고 있었다. 지성은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혜정에게 잘못한 점은 너에게 얘기를 했었다. 그 외 다른 모든 것은 그 여자들 본인의 문제야. 난 혼자 있고 싶었지만 그녀들이 가만히 놓아두지를 않더군. 하긴 부와 명예, 지성, 외모를 모두 갖춘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그게 문제지.”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버지께 묻지 않겠어요. 다만 한가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진심이었나요? 솔직히 얘기해 주세요. 아버지.”

 

내가 진심이 아니었다고 얘기를 하면 아버지를 공격하기라도 할 표정이구나. 그래서 겁이 나서 솔직하게 얘기를 할 수 있겠어?”

 

아버지, 다시 묻겠습니다. 어머니를 사랑하셨나요?”

 

사랑을 안 했으면 결혼을 했겠어? 그리고 이미 그 이야기는 너와 끝난 얘기가 아니더냐?”

 

아뇨, 아버지. 그건 아버지가 진솔하다는 믿음에서 말한 거였어요. 아버지가 유림이 얘기한 것처럼 여성 편력이 심하고 사랑을 십 대들 불장난처럼 생각하시는 분이라면 얘기는 달라져요. 어머니는 목사가 휘두른 칼에 운명하셨지만 그 칼을 지어준 진짜 살인자는 바로 아버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리란 여자도 어머니로 받아들일 수 없어요.”

 

혜성아, 말이 심하구나. 내 비록 널 대상으로 몹쓸 짓을 하였지만 그게 너에게 질책을 받을지언정 살인자란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널 수술한 후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밤으로 지새웠는지 넌 모를 거다. ”

 

이야기를 돌려서 하지 마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어머니를 사랑하기는 했었나요?”

지성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난 내 양심을 속이지는 못하겠구나. 난 혜정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

 

순간 혜성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당신은 이중인격자야. 당신 같은 사람은 나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혜성은 유림의 옆에 서 있던 경관의 총집에서 총을 재빨리 꺼내었다. 그리고 지성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세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지며 지성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미래는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들의 말대로 난 당신을 총으로 살해하는군. 부디 어머니를 만나면 용서를 빌기 바랍니다.”

 

그런데 쓰러졌던 지성이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성은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몰라서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혜성, 당신이 쏜 총은 공포탄이에요. 당신이 지성과 얘기를 나누는 사이 미리 경관에게 말해서 실탄을 공포탄으로 바꾸어 놓았어요? 당신은 살인죄는 피할 수 있군요. 아빠 없는 아이로 절 키우고 싶지 않아요. 전 이제부터 내가 저질러놓은 일들을 원래의 상태로 바꿔놓아야 해요. 안 그러면 저는 경관의 말대로 비참하게 죽어갈 거예요. 언제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 일이 있고 나서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혜성은 수능에서 예상대로 만점을 받았고 송이와 함께 미국에 있는 송이의 할아버지 K 회장을 만나서 인사를 드렸다. 지성은 유리와 헤어진 후 또 다른 여자와 재혼을 하였고 혜성은 지성과 완전히 갈라졌다. 혜성의 보석금은 전부 K 회장이 주는 바람에 혜성은 다행히 감옥에 갇히지 않아도 되었다. 이렇게 모든 일이 하나씩 풀려나가고 송이가 아기를 출산하던 그 날 혜성은 출산실 앞에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성은 출산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속이 타들어 갔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밖으로 몸을 나타내었다.

 

산모와 아이는 건강해요. 여자아이는 3.8kg으로 아빠를 많아 닮았어요. 축하드려요.”

 

그때 멀리서 한 소녀가 꽃다발을 들고 혜성이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소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어머니 김유림을 대신해서 이 꽃다발을 선물로 가져왔어요.”

 

꽃다발을 받은 혜성은 웃으면서 소녀에게 물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니? 그리고 어머니는 건강하셔?”

 

. 어머니는 건강하게 잘 계셔요. 제 이름은 김 미리내에요.”

 

좋은 이름이구나. 네가 사는 곳의 사람들은 어때요?”

 

. 모두 행복하고 잘 살아요.”

 

. 그래. 여기는 너 혼자 온 거야? ”

 

저는 이만 가보겠어요. 안녕.”

 

어떻게 돌아간다는 거니? 다른 동행한 사람이 있어?”

 

혜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복도 끝 쪽에서 두 사람이 푸른빛과 함께 나타났다. 유림과 타임캅의 잘생긴 그 남자였다.

 

아버지 안녕하세요. 여기는 제 남편 김우주예요. 그간 여러모로 걱정을 끼쳐서 죄송해요. ”

 

우리가 살아갈 미래는 아름답니?”

 

아버지, 그건 저도 몰라요. 아버지의 미래는 아버지만 알고 있을 뿐이에요. 우리의 미래는 아름다울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수고하세요. 이제 영원히 절 보지 못할 거에요. 전 시간여행을 이걸로 끝내려고 그래요. 안녕히 계셔요. 건강하세요.”

 

유림과 우주, 미리내가 복도 끝으로 총총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푸른빛과 함께 그들은 혜성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병실의 문이 열리고 갓 태어난 유림이 혜성을 보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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